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셀림 2세 (문단 편집) === 치세 === [[파일:튀니스 1574 2.jpg]] 키프로스 정복과 함께 그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되는 [[튀니스]] 정복 골육상쟁을 거친 끝에 쉴레이만 대제의 후계자가 되어 1566년, 오스만 제국의 11대 술탄으로 즉위한다. 매우 유명했던 아버지인 [[쉴레이만 1세]]와는 달리 군사적인 행동을 회피한채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다.[* 오스만 제국의 황제 중 정복전쟁에 친정을 하지 않은 황제는 셀림 2세가 처음이었다.] 특히 술을 대단히 좋아했기 때문에 '주정뱅이 술탄'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.[* 당연하지만 군사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데, 이전까지 역대 술탄들 가운데 타국을 공격하든 타국의 공격으로부터 오스만 제국을 보호하든간에 군사에 흥미를 보이지 않은 술탄은 '''없었다.'''] 그러나 그가 즉위해 있는 동안 오스만 제국은 그럭저럭 잘 돌아갔는데 재상이었던 [[소콜루 메흐메트 파샤]]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.[* 황위 계승 과정에서 셀림이 바예지트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, 재상인 소콜루가 군대를 지휘하여 바예지트를 물리쳤기 때문이다.]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동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권을 확립시켰으며 아라비아 반도로 진출하여 [[예멘]] 정복도 성공적으로 끝났다. 그리고 [[키프로스]]를 점령했는데 '''품질 좋은 포도주 산지여서(...)''' 그랬다는 야사가 있다. 문제는 이 키프로스 공략은 [[레판토 해전]]의 시발점이 되었고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은 유럽 연합군에게 패배한다.[* 하지만 소콜루 파샤는 레판토 해전의 패배는 '''오스만의 수염이 살짝 그을린것에 지나지 않는다.'''라고 호기롭게 말했고 얼마 되지도 않아 레판토 해전에서 궤멸된 것보다 더 많은 해군 함대를 만들어 내 [[스페인]]이 점거하고 있던 [[튀니지]]를 점령하였다. ~~저그가 따로 없네~~] 레판토 해전 자체는 오스만에게 큰 타격이 아니었지만 셀림 2세 사후 오스만에 궁중 암투가 벌어지고 유럽의 군사력이 강해지면서 오스만의 팽창도 멈추는 계기가 되었다. 그의 치세에서 나중에 오스만 제국의 가장 큰 적이 되는 러시아와 처음 조우하게 된다. [[아스트라한]]에서 러시아와 오스만의 충돌이 있었는데 아스트라한으로 가는 오스만의 함대가 폭풍으로 흑해에 침몰하게 된다. 문화적으로는 쉴레이만 치세의 발전이 계속되었는데, 오스만 제국의 유명한 건축가인 [[미마르 시난]]이 부황에 이어 셀림 2세 제위 시기에도 큰 활약을 하였다.[* [[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|미켈란젤로]]에 비견될 정도의 대건축가로, 발탁된 것은 쉴레이만 시대. 미마르(mimar, 이 단어 자체가 건축가라는 뜻) 시난의 대표작으로는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와 셀리미예 모스크를 들 수 있는데,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전자는 쉴레이만 시대. 후자는 셀림 시대의 작품이다.] 그리고 셀림 2세 자신도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가 만든 시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. 그 내용은 주로 자신의 황후였던 눌바누 술탄[* 세실리야, 혹은 올리비아라는 이름의 [[베네치아 공화국]]의 귀족 여성 출신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, 스페인계 [[유대인]]이라고 기록한 오스만 제국측 사료도 전해진다.]에게 보내는 연애시들. 오스만 제국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 '최초' 라고 할 만한 기록도 두 개 세웠는데, 문제는 이 기록이라는 게 하나같이 시궁창.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면, '역대 황제들 가운데 처음으로 직접 군사를 지휘한 적 없는 황제'[* 셀림 2세 이전까지 가장 문치적(文治的)이라고 할 만한 황제로는 치세 30년 내내 내정에만 골몰한 증조부 [[바예지트 2세]]를 들 수 있지만, 그마저도 치세 초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[[몰다비아 공국]]으로 원정을 단행한 바가 있다.], '역대 황제들 가운데 처음으로 제 손으로 재상에게 정권을 넘겨준 황제' 라는 것들이다. 그리고 셀림의 뒤를 이은 황제 무라트 3세는 셀림의 두 가지 기록 가운데 앞의 것을 충실히(...) 본받았고, 다시 그 뒤를 이은 메흐메트 3세는 두 번째 것을 본받았다. ~~ 그리고 오스만 제국은 막장이 되었다 ~~ 그래도 위에서 언급됐듯 셀림 2세의 제위 기간까지는 부황의 치세를 이어받아 제국의 전성기가 지속되었다. 본격적으로 국정에 노란불이 켜진 건 [[소콜루 메흐메트 파샤]]가 암살당하고 태후가 된 눌바누 술탄이 국정에 개입하기 시작한 무라트 3세 시기. 개인적으로는 너그럽고 관대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. [[휴렘 술탄|어머니]]의 평생 연적이자 황위 경쟁자였던 이복형 무스타파의 모친인 마히데브란 술탄이 무스타파 처형 후 지방에서 궁핍하게 살고 있는걸 보고 그녀의 지위를 회복시켜 준 후 그녀가 죽을 때까지[* 셀림 2세의 아들인 무라트 3세 제위 때까지 살았다.] 극진히 대우 받으며 살 수 있게 해줬으며 초라하게 묻힌 이복형 무스타파의 묘를 중건했던 것도 셀림 2세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